「유령화된 존재로서 이미지를 (능동적으로)거부하기」

 

권시우(비평가)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됐다는 전제는, 어느새 클리셰처럼 소비되고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사용자로서의 주체가 이미지에 보다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가설을 토대로, 우리의 ‘확장된 자율성’에 호소한다. 그러나 ‘확장된 자율성’은 사실상 개별 이미지와의 관계(성)에 종속돼 있을 뿐이다. 만약 이미지가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면서, 한때 우리를 주체로 규정했던 사용자라는 정체성을 압도한다면 어떨까? 실제로 웹 상에 산개해 있는 이미지의 잔해들은, 알고리즘의 역학에 의해 거의 실시간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사용자가 미처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이는 자연스레 (사용자 편의성이라는 기치 아래) 사용자를 소외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주체의 관점에서 이미지를 개별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하기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확장된 자율성’은 사실 알고리즘이 사용자에게 제공한 이미지와의 지엽적인 관계를 대변하는 레이아웃의 형식에 가깝다. 우리는 그러한 레이아웃 속에서 이미지를 (사용자 편의적으로) 식민화하는 과정에 몰두한 나머지, 그것을 추동하는 권력 의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여지에 대한 논의를 유보하고 있다. 즉 우리가 사용자로서 이미지에 선행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에 따라 이미지를 남용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일상 차원에서 기꺼이 수행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미지와의 위계를 지속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권력 의지는 (사용자에 선행하는) 레이아웃에 의해 규정된 허구에 불과하다. 달리 말해 사용자는 오로지 레이아웃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주체로 자각할 수 있는 허구적 존재에 가깝다.

 

 장입규는 얼핏 그러한 허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cut and paste>(2021)로 대변되는 근작들은, 작가가 자신의 일상을 배회하면서 다소 무작위하게 수집한 사물들을 이미지와 대응시킨 채, 각기 다르게 편집한 결과다. 이는 (알고리즘에 의해 호명된) 사용자의 관점을 토대로 사물들의 이해관계를 재/구성하면서, 앞서 논의한 레이아웃이 이제 현실마저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레이아웃이 광범위하게 확장된 상태는, 결국 우리가 여전히 주체성을 권위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허구를 증폭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사용자는 언제나 주체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디지털 기술은 그러한 상태를 점차 가속화하는, 즉 우리가 스스로를 주체로 호명하기 위한 가능성의 영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종의 촉매로 기능한다.

 

 그러나 일련의 작업들은 단순히 사물-이미지를 유희적으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과정을 왜곡시키는 데 주력한다. 즉 작가가 사물을 이미지 차원에서 편집하는 행위는, 그것에 내재된 상품으로서의 사용 가치를 위반하려는 시도이며, 이로써 사물은 레이아웃 속에서 자신의 환영성을 부각시킨다. 문제는 이때의 환영성이 작가에 의해 편집된 사물들의 (사용 가치와 무관한)이해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상품이라는 물신을 해체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레이아웃이 조성한 이미지의 영토를 재편하려는 권력 의지의 무용함을 폭로하기에 이른다. 즉 이미지를 답습한 사물들의 이해관계가 환영이라면, 결국 주체의 식민화 전략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무단 점거함으로써 주체성을 확증하는 모순적인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침내 주체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자각하게 된다. 즉 <cut and paste>는 사물이 현전하는 상태와 그것을 거듭 유보시키는 이미지의 역학 사이를 가늠하게끔 유도하면서, 레이아웃에 종속된 주체의 제한적인 시야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러한 인지적 혼란은 우리가 사용자의 권한에 자족하지 않은 채, 레이아웃의 외부에 기꺼이 편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주체를 계승하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낙관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레이아웃의 외부는 (주체와 무관한) 이미지의 잔해들로 과포화된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그곳은 알고리즘에 의해 계속 증식하는 이미지들이 초래한 폐허이며, 결국 개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미지의 총량은 인지적 혼란을 넘어서, 자아라는 합의의 형식을 와해시킨다.

 

 그러한 파국은 <Social Network Service>(2021)에서 이미 예견돼 있었다. 해당 작업이 작가의 타임라인에서 다소 예외적인 이유는, 바로 이미지와 부합하려는 개인의 불확실한 실존을 직설적인 방식으로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공간 상에 평행하게 도열해 있는 의자들은, 그것들과 마주한 각각의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촬영되고 있고, 관객은 그런 식으로 연출된 장면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다. 문제는 관객이 임의적으로 선택한 의자에 착석하는 순간, 관객 정면의 스크린이 송출하고 있는 사분할된 의자의 이미지로 수렴된 채, 자신의 신체 일부를 노출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작가는 카메라로 대변되는 ‘기계의 눈’에게 감시당하기를 자처함으로써 이미지 차원에서 비/자발적으로 편집된 신체를, 지금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SNS의 맥락 속에서 제시하고 있다.

 

 편집된 신체는 한때 그것이 담보하고 있던 인간의 물리적인 형태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점차 고어gore해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고어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편집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관객은 여전히 멀쩡하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관객이 스스로를 유사 고어물로 소비하게끔 유도하는 상황이며, 이는 ‘기계의 눈’을 향한 노출증적 감각의 선정성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감각이 사실상 폐허에 가까운 이미지의 생태계에서 부/적응하고 있는 자아에 의해 조형된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결국 편집을 명목으로 스스로를 훼손하는 장면을 관망할 뿐인 탈주체의 유령적인 상태를 지향할 수 밖에 없는가? 앞서 <cut and paste>가 사물-이미지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드러냈던 감각의 틈새는, 우리가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 주체의 관점에 빙의할 것을 요청한다. 즉 사물의 환영성은 이미 탈주체화된 개인과 의도치 않게 공명하면서, 환영이 현전하는 상태를 가시화할 수 있는 개인의 역량을 토대로 주체성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아보다 비대해진 이미지의 총량을 수용할 수 없지만, 그와 별개로 이미지가 (레이아웃을 초과한 채) 현실로 유입되는 문제적 상황에 대한 증거로 사물의 환영성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는 환영을 무려 객관적으로 합의하기 위한 발단이며, 합의가 원만하게 전개될수록 주체로부터 소격된 유령은 자신의 존재론적인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즉 유령이라는 존재는 ‘기계의 눈’이 미처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대상으로 거듭난 채, 자신을 이미지로 재현하려는 자동화된 방식을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때 감각의 틈새가 요청했던 주체의 관점은, 사실상 자아로 대변되는 통합적인 주체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유령의 의지를 발생시킨다. 일련의 작업들은 그러한 강령술을 위해 사물-이미지를 제의적 도구로 활용하면서, 다름아닌 우리를 반복해서 유령으로 초대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초대에 어떻게 화답할 지는, 아직까지 미결의 문제로 남아있다.

[2022아트경기] 작가-평론가 매칭 프로그램

 

최정윤(독립기획 및 비평가)

 

                싸이월드에 미니룸이라고 각자의 미니홈페이지 안에 작은 방을 꾸며 만들어놓을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이 있었다. (요즘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플랫폼으로는 네이버의 제페토나 아크버스가 있다.) 가상공간에서 나를 대신할 아이콘의 머리모양, 옷, 표정 등을 고르고, 말풍선에 하고픈 말도 적어 넣는다. 실제 내 방이 어떻든 상관없이, 미니룸에는 내가 좋아하는 가구와 사물들로 가득 채워 넣을 수 있다. 우리는 실제 삶의 공간보다 더 빛나고 아름답고 귀엽게 미니룸을 꾸밀 수 있고, 나의 취향을 누구에게나 보여준다. 이곳은 현실에서 하기 어려운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고의 과정을 정 반대로 뒤집어, 미니룸이 진짜라고 상정하고,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 미니룸의 모습을 똑같이 펼쳐 보이는 걸 상상해본다. 상상만으로도 꽤 흥미진진하다. 현실세계에 펼쳐진 가상세계 말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된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10여 년 정도 사용했을까? 스마트폰을 쓰기 이전의 삶이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중독되어 기술에 푹 길들여져 있다. 녹음기, 사진기, 전자사전, 지도 등을 따로 들고 다녔던 때가 이제 아득하게 느껴진다. 인류가 편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발명품들인데, 기계에 의존하면 할수록 그에 맞춰 인간이 가지고 있던 몇몇 능력들이 퇴화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제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컴퓨터 화면을 보며 보낸다. 일을 하거나, 소통을 하거나, 심지어 여가시간을 보내면서 말이다. 걸어 다니고 땀을 흘리면서 누군가와 부딪치는 현실의 경험이 아닌, 2차원의 평평한 화면을 응시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화면 너머의 세상에서는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쉽게 분간해내기 어렵다. 사진은 쉽게 조작되고, 아무 것도 아닌 삶을 그럴듯하게 꾸며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장입규는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넘나들며 관객으로 하여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작품이 전시의 경우, 직접 전시장에 와서 관람하는 관객만큼이나, 온라인에서 작품 이미지로만 접하는 경우도 많다. 사진이 실제작품보다 더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 보지 않으면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장입규의 작품은 후자에 속한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깔끔하게 잘린 오브제들이 선에 맞추어 배치되어 마치 2차원의 평면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자리를 옮겨 측면에서 작품을 관람하면, 그것이 3차원의 오브제로 이루어진 부조, 조각, 혹은 설치 작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우산, 시계, 옷걸이, 신발 등 형태가 명확한 오브제들을 선택해 그라인더나 칼, 톱으로 자른다.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와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클릭 몇 번이면 끝날 간단한 작업이지만, 실제 사물을 이용해 자르는 일은 굉장한 시간과 물리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 <desktop>(2020)은 우리가 컴퓨터를 켜면 바탕화면에 보이는 아이콘을 현실세계로 동일하게 끄집어내 재구현한 작품이다. 산의 모양을 담은 이미지 아이콘, 종이폴더 모양을 따라한 폴더 아이콘, 그리고 실제 휴지통까지. 그는 온라인, 디지털 환경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직설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이미지-퍼즐-놀이 한번 해보지 않으시겠어요?

 

신보슬(큐레이터)

 

쉽게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째깍째깍 시간은 흐르고, 깜빡깜빡, 빈문서의 커서는 압박해오는데,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멍하니 깜빡이는 커서만 보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쉽게 쓸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근거를 찾기 위해 나는 다시 그가 보낸 포트폴리오와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기로 했다. 작업 속 이미지를 꼼꼼히 글로 옮겨보기로 했다.

 

1. <Aesthetics of editing>, 다양한 오브제, 라인테이프, 페인트, 나무각재, PVC 필름, 색지, 잉크젯 프린트,      액자 가변설치, 2022

벽면은 하늘색 라인테이프로 구획되어 있고, 그 위에 다양한 오브제들이 줄지어 놓여있다. 조각난 시계, 잘려나간 옷걸이, 부러진 지팡이 손잡이와 구두주걱, 화장실 표지판과 빗자루. 이 맥락 없이 선택된 듯 보이는 오브제들이 가이드 라인에 맞춰 열을 서 있다. 같은 오브제들이 반복되는가 하면, 잘려나간 오브제의 조각이 뜬금없이 벽 한귀퉁이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벽걸이 시계는 빨간색 색지로 가려져 있는가 하면, 노란색 포스트잇 같아 보이는 색지들이 줄지어 늘어선 가운데, 색지 위에서 반복되는 옷걸이 이미지는 의외의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점선으로 된 사각형의 박스에는 댕강 난 벽시계의 일부가 천연덕스럽게 들어가 앉아 있고, 나란히 일렬로 정렬된 빨간색 사각바구니와 프라이팬, 효자손, 빗은 가이드라인 아래 부분은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밑동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모습이 어딘가 낯익다. 폴더에서 파일을 불러와 가볍게 자르고, 복사하고, 붙이고, 지웠던 디지털 이미지 편집, 포토숍의 편집화면을 닮아 있다. 그러고 보니, 점선으로 된 박스형태의 이미지, 하늘색 가이드라인은 관람객에게 던져준 힌트였다. 디지털 편집방식의 프레임을 가져와 실제 오브제를 배치하여 현실공간 안에 물리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진철함이었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보기 위해 때론 솔직하고 과감한 인정이 필요할 때도 있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관객에게 본인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를 쓰고 있었고,

그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 말고, 좀 더 근사한 맥락을

만들어보겠다며 혼자서 이런저런 수식어구를 더해보기도 하고, 이론가의 인용구를

덧붙여보기도 했지만,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느낌에 불편했다. 결국,

보이는 그대로를 보기로 했다. 작가가 보여주기로 했던 그 부분을 집중해서 보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벽면에 배치된 오브제들이 음악처럼 보였다. 분명 단단한 물성을 가진

오브제였지만, 작가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 벽면에 배치된 오브제들은 형태로, 색깔로,

텍스쳐로 다가왔다. 작가의 예민한 미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과중한 의미부여의 고질병에서

벗어나면 작품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다시한번 느꼈다.

 

1-1. <umbrella>, <cane>, <folding rule>, <rope>, 잉크젯 프린트, 2019

흩날리는 듯 파편화된 오브제 배열 사이에 있는 네 개의 사진 이미지는 마치 주변에 있는 오브제들이 이후에 어떤 식으로 완결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 같다. 잘린 나무막대기, 의자, 가구, 천조각들로 3차원 설치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평면으로 보이는 각도를 찾아 촬영한 이 네 개의 사진들이 자연스럽게 외부에 설치된 오브제들과 이미지적으로 연결시킨다. 2021년 작품인 <cut and paste>의 경우, 일상에서 찾은 오브제들을 잘라 모눈의 벽면에 비치하는 데 그쳤다면, <aesthetics of editing>에서는 모눈격자를 디지털 편집창과 닮은 프레임을 만들어내고, 그 위에 이미지를 배치함으로써 디지털 편집과 현실관계에의 연결점을 잘 드러낼 뿐 아니라, 오브제들 설치에서 사진으로 만들어진 과정의 시간, 앞으로 편집 가능한 시간까지도 시각화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1-2. <the chair that no one can sit in>, 다양한 오브제들, 2019

검은색 의자. 그 앞에 길고 좁은 사각의 프레임이 보인다. 위쪽 옷걸이 같은 곳에는 수건이 걸려있고, 바닥에는 검은색 여성구두가 놓여있다. 가지런히 놓여있지 않은 것을 보니, 외춣했다가 급히 들어온 모양이다. 구두 뒤로 벽에 기댄 작은 액자가 보인다. 다시 보니 작은 거울같기도 하다. 이 좁고 긴 사각의 프레임 양쪽으로 의자가 보인다. 의자 앞쪽에 거울을 세워 둔 것인가 싶지만, 옆으로 살짝 비껴 보니, 의자를 잘라내고, 벽과 바닥에 비스듬히 나무프레임을 설치한 후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설치였다. 제목처럼 그 의자는 ‘아무도 앉을 수 없는 의자’였다.

 

프레임

장입규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프레임에 주목해야 한다. 초기 영상작품에서부터

설치, 사진작업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에서 프레임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것의 허점을 드러내는 장치이자, 디지털 세계로 나아가는 창이고, 작품을 읽어내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프레임 바깥과 프레임 안. 프레임으로 구분되고 단절되는 세계들을

연결해주는 창구이기도 하다.

 

2-1. <Social Network Service (SNS)>, 의자, 카메라, 컴퓨터, 빔프로젝터, 삼각대,

       인터렉티브 실시간 비디오설치, 2021

네 개의 의자가 나란히 놓여있고, 각각의 의자 앞에는 삼각대 위에 올려진 카메라가 있다. 관객 앞에는 관객이 앉은 의자와 동일한 의자 화면이 보인다. 관객이 의자에 앉으면 화면 속 의자는 사라지고, 4분의 1만큼의 관객의 모습이 드러난다. 나머지 의자에 모두가 앉아서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지만, 그마저도 온전한 이미지라 부르기에는 한계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디지털 매체를 중심으로 한 비대면 소통의 시기를 빗댄 이 작품을 통해서 제한적이나마 관객의 참여로 완성되는 실시간 소통을 기대했다고 작가는 말했다.

 

다시 한번, 프레임

<Social Network Service>는 아주 단순한 인터렉티브 설치작품이다. 작가는 가상과 현실,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에 방점을 찍어 이 작품을 설명하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두드러지는

것은 사각의 프레임이다. 네 개로 쪼개진 프레임. 부분밖에 보이지 않는 프레임 안에서

참여자는 부분의 역할을 다하여 전체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4분의 1씩 기능하면서 만들어지는

시각이미지는 온전한 개체의 즉각적인 반영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하고 어색한 이미지

일 수 있으나,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시각적 즐거움은 그 어색함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이미지-퍼즐-놀이에로의 초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보면 다양한 관심사와 실험적인 태도로 인해서 일관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장입규의 작업은 다양한 형식실험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초기작에서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세상(가상세계)과 현실 세계와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드러내는 시각적 이미지 구현이라는 주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디지털 세계에서 자르고, 복사해서 붙이는 것이 자연스럽듯,

본인의 과거 작업을 자연스럽게 불러오고 조금씩 변형해서 새로운 작업에 이식한다. 그

과정에서 물리적인 오브제가 가지고 있는 물성들을 가볍게 날아가고 관객은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각적 형태를 오롯이 즐길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종종 예술이라면 뭔가 의미심장한 작가적 의도와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곤 한다. 이맛살을 찌뿌리고 심각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은 어렵다고 쉽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좀 더 가벼울 수 있다고, 그 의미라는 것이 형식적인 실험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장입규의 작업은 이야기한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즐기고, 이미지

퍼즐 놀이에 한 번 빠져봐도 되지 않겠느냐며 작품으로 초대한다.

 

“이미지-퍼즐-놀이 한번 해보지 않으시겠어요?”

씨알콜렉티브 <장입규: 누가 우리 귀여운 코끼리의 코를 잘랐나.>

 

조새미(미술비평)

 

                   연남동 복합문화공간 씨알콜렉티브에서 열린 작가 장입규의 세 번째 개인전. 전시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누가 우리 귀여운 코끼리의 코를 잘랐나.'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그 영화는 공포 영화였을까? 만약 코끼리가 출연했다면 그 코끼리는 귀여웠을까, 아니면 기괴했을까? 하지만 이러한 질문을 뒤로 한 채 전시공간에선 코끼리를 다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1929년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가 <이미지의 배반 (La Trahison des images)>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썼던 것과 유사한 맥락으로 장입규는 '이것은 코끼리가 아니다'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제시했다. '코끼리'는 기호일 뿐이며, 장입규는 예리한 칼로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귀여운 코끼리의 코'를 자른 사람은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이다. 게다가 이 문장은 물음표 대신 마침표로 끝나기에, 우리는 작가가 누가 코끼리의 코를 잘랐는지 묻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전시명은 작가의 고백에 가까운 독백이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코끼리 대신 옷걸이, 의자, 벽시계, 쓰레받기, 훌라후프, 지팡이 등 익숙한 일상의 사물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 사물들로부터 핵심 구조를 제거해버렸다. <Cut and Paste>(2019)에서 의자는 등받이만 남은 채로 벽에 부착되어 있고, 일부만 남은 옷걸이는 무게 중심이 맞지 않아 옷을 걸 수 없으며, 가방은 손잡이만 남아 물건을 담을 수 없다. <Reconstruction>(2019)의 경우 작가는 조명 받침대와 샤워기를 선택해 마치 원래부터 하나의 사물이었던 것처럼 연결했다. 이 작업은 고전적 레디메이드(ready-made)에 관한 오마주이기도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자전거 바퀴(Bicycle Wheel)>(1913)와 같은 레디메이드는 인간의 감정과 거리를 유지하는 반면, 장입규의 작업은 마치 초현실주의 오브제처럼 매력을 발산하며 말을 걸어온다.

 <The Chair that No one can sit in>(2019)의 경우, 좀 더 연극적이다. 의자에 기댄 폭이 좁은 거울 속 누군가의 방 안 모습이 보인다.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검은 여성 구두 한 켤레와 푸른 페인트로 칠한 벽면, 옷걸이에 걸린 회색 수건도 보인다. 발걸음을 옮겨 옆으로 이동하니 거울이라고 생각했던 사물은 거울이 아니었다. 조작된 공간, 이 상황은 연극의 무대처럼 동선까지 철저하게 계획한 결과였다. 작가는 이를 통해 인간의 감각 지각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실험했다.

 작가는 자르고 붙이는(Cut and Paste) 디지털 편집 방식을 현실 공간에 적용하면서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다. 그런데 픽셀에 의존하는 가상의 세계에서 자르고 붙이는 행위는 지극히 평면적이지만 장입규의 작업 행위는 물리적인 동시에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 그의 작업에서는 사진을 자르는 행위조차도 3차원적이며 수공예적이다. 나무 의자조차도 오차 없이 절단하는 장입규의 작업은 인간 삶의 환경, 특히 매체 환경의 변화에 관한 질문이 담겨있다. 마치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이 영화<모던 타임스(Modern Times)>(1936)에서 20세기 초 인간이 적응해야 하는 세계의 속도에 관해 탐구했듯, 장입규는 21세기 초 인간이 적응해야 하는 상황은 어떠한지 일상 사물의 변용을 통해 진중하게 질문한다. 20세기 초 인간이 공장 기계의 속도에 맞춰야 했다면, 21세기 초 인간은 기호와 암호로 가득한 가상의 문법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 역설적이게도 장입규는 사물을 자르고 붙이는 물리적 활동을 통해 기호화된 일상이라는 현실의 연극 무대를 구축했다.

 장입규는 레디메이드 개념을 재해석했고, 감각 지각의 상호작용을 탐구했다. 그는 코끼리 없는 코끼리 전시, 초현실적 레디메이드 그리고 디지털 편집 방식의 수공예적 구현이라는 아이러니 속에서 보여주기와 이름 붙이기, 복제하기와 분절하기, 바라보기와 읽기라는 대립을 놀이와 웃음으로 삭제해버렸다.

누가 우리 귀여운 코끼리의 코를 잘랐나.

 

유진영(큐레이터)

 

                 오랜 세월 유럽 대륙에서 종적을 감춘 채 신비의 동물로 일컬어져 온 코뿔소는 16세기 초, 인도 사절단과 함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다시 등장했다. 이 신비의 동물은 입에서 입을 타고 그 기묘한 존재감을 유럽 곳곳에 과시했다. 뒤러의 코뿔소 역시 이 시기 한 상인의 말에 뒤러 자신의 상상을 덧붙여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갑옷같이 딱딱한 껍질로 둘러싸인 몸, 비늘이 돋은 다리, 가시처럼 뾰족한 엉덩이의 뿔을 가진 뒤러의 코뿔소는 구조적 오류가 발생한 이미지 파편들의 엉성한 조합처럼 보인다. 이 코뿔소에게 콧잔등에 난 뿔은 더 이상 유일무이하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코뿔소는 그 뿔보다는 갑옷같이 두터운 피부가, 혹은 얼룩 반점으로 뒤덮인 색깔이 더 주요한 특징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뒤러의 기묘한 그림이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코뿔소를 표상하는 절대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은 주관적 인식의 다발로써 형성되는 대상 개념의 허상성을 드러낸다.

 《누가 우리 귀여운 코끼리의 코를 잘랐나.》에서 장입규는 하나의 대상을 이루는 보편적 관념 체계를 의문시한다. 코끼리를 가장 코끼리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눈을 감고 만져보아도 단박에 코끼리임을 알아챌 수 있게 하는 것은 역시 코뿐일까? 대상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시간과 언어, 갖가지 신념의 응집체는 그것에 단단히 붙어 사고의 우회로를 막는다. 장입규는 이러한 관념과 개념 사이의 역학 관계를 비틀어 본다. 우연히 사물을 자르는 것에서 출발한 그의 이번 작업은 디지털 매체의 편집 기법인 ‘잘라내기,’ ‘붙여넣기,’ ‘복사하기’ 등을 스크린 위가 아닌 실제 공간 안에서 수행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디지털 세계의 문법을 물질세계에 옮겨오는 그의 시도는 동시대의 시지각 체계가 디지털의 논리 안에서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실험해보는 실험의 장이다. 대상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형성되는 우리의 인식체계에 관해 질문하는 작가의 행위는 의자 반쪽이나 빗자루의 머리를 뚝 ‘잘라내기’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물리적 세계에서 디지털 상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장입규의 행위는 아이러니하게도 대단히 아날로그적이다. 대상을 자르고 붙이는 과정뿐 아니라 사물의 선택 과정 역시 물리적인 여정을 수반한다. 유영하듯 흐르는 웹에서의 정보 수집 과정과는 달리 그는 한 발, 한 발 몸을 움직여 갖가지를 수집한다. 찾고 싶은 키워드를 검색창에 입력하는 것이 웹서핑의 첫 단계라면 장입규의 검색 과정은 이와는 정 반대이다. 그는 무엇을 만날지, 무엇을 사고 싶은지에 대한 어떠한 예측도 없이 자신이 머무는 장소 곳곳의 벼룩시장과 길거리를 헤매다가 우연히 마음에 맞는 대상을 발견하고 선택한다. 그것은 다리 하나가 짧은 의자가 될 수도, 시간이 멈춰버린 시계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발견되고 선택된 사물들은 벽면의 그리드(cut and paste, 2019), 혹은 사진의 프레임(cable, 2019) 안에서 마음껏 변용되고 재배치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끝없는 유비는 장입규의 작품 안에서 경쾌한 방식으로 궤적을 이룬다. 옷걸이의 잘려나간 한 귀퉁이는 저 너머의 벽면에 능청스럽게 붙어 원래 그렇게 생긴 양, 혹은 그곳이 자신의 제 자리인 양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비와 분리되었던 빗자루의 손잡이는 다른 물건의 손잡이들과 짝을 이루어 없어진 몸통을 다른 곳으로부터 ‘붙여넣기’ 중이다(Delete, 2020). 그렇게 수공으로 ‘잘라내기’와 ‘복사하기’, ‘붙여넣기’를 반복한 편집의 결과물은 최대한 납작한 모습으로 실제의 공간을 점유한다. 그러나 매끈한 스크린 위에서 하나의 면이 되어버린 세계와는 달리 3차원의 물리적 세계에는 여전히 방향성이 존재한다. 붙여 넣어진 사물의 조각들은 어디에서 보아도 무관할 듯해 보이지만, 이내 평면의 세계를 튀어나와 물리적 공간의 질서와 부딪힌다. 그렇게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편집된 사물의 면면은 현실과 디지털 세계의 경계를 오가며 오작동하고 두 세계 모두를 비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