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입 규
지금 이곳에 살기 위하여[1]
주시영(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디렉터)
디지털과 디지털 세계에 관해 ‘강해’를 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강해’는 보통 어떤 주제에 관한 텍스트, 해석, 해설 등을 논하면서 풀어내는 강의 방식이다. 디지털의 어원은 라틴어 디기투스 digitus로 거슬러 올라간다. ‘손가락’을 의미하고, ‘이야기하다’라는 단어와도 연관있는 digit은 숫자의 세계, 가상의 세계, 디지털 세계의 근간이 되었다. 디지털 강해를 시도하는 장입규의 실험은 디지털 세계에서 활용하는 디자인 도구들과 그 결과물을 실제 세계 안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복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디지털 세계에 관해 심도있게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실제 세계를 디지털로 변환하고자 하는 인간의 궁극적 의도, 즉 물질세계를 손아귀에 장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보이고 경험되는 모든 것을 digit 0과 1의 궤도 안으로 모조리 변환하고 흡수한다. 비트의 세계와 원자의 세계는 분리되어 존재하지만, 두 세계는 모방과 흡수를 반복하며 연결을 강화하고 있다. 실제 세계의 고유성을 흉내내는 디지털 세계의 감각적 스펙터클은 점차 다양한 자극으로 변모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실제 세계를 모방하는 것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 대상이 간직하고 있는 본래의 아름다움에 관한 심미적 경험은 과연 어떤 가치 기준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장입규는 아날로그 세계가 디지털 세계로 전환되는 과정을 역으로 추적하는 방식을 통해 디지털 세계에 관한 강해를 풀어간다. 전시는 인간이 놓인 이 두 세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감각과 지각, 그리고 세계관의 변화에 관한 비유적 설명(anological teaching)이 될 것이다.
손 안에 있는 사물을 다루면서 사물과 관계를 만들어간 것은 태초부터 인간이 살아온 고유한 방식이었다. 생존을 위해 손을 사용했던 인간의 역사는 움켜쥔 사물을 도구화하여 손을 활용한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해 나갔다. 손을 통해 사물과 관계를 맺으며 경험해온 감각의 변화는 결국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움켜쥐고, 쓰다듬고, 터치하는 손놀림과 손가락 사이에 스며들었다. 손 안에 쥐어질 수 있는 세계는 나만의 세계, 내가 조작할 수 있는 세계가 된다. 스마트 글래스(smart glasses)가 가져올 감각의 재편은 터치 스크린의 조작을 넘어선다. 동공으로 클릭하기, 목소리로 명령하기, 손바닥으로 쓸어내기, 손가락 꼬집기 등의 움직임은 손바닥 안에 담긴 작은 사물을 조작하는 것 너머의 감각과 지각의 변화로 이어진다. 우리는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거나 허공을 응시한 채 머무를 곳 없는 그곳에서의 몸부림을 익히는 것으로 어지러운 유영에 적응해 갈 것이다. 장입규는 디지털 세계에서의 디자인 도구(tool)를 활용한 제작 방식을 실제 세계로 가져와 그 과정과 결과물을 실물로 제작한다. 그는 디지털 펜을 이용하는 대신, 손과 연필을 이용하여 밑그림을 그린다. 실제 사용하는 사물들, 목재, 톱, 페인트 등의 재료와 도구를 활용하는 작업은 자르고, 다듬고, 문지르고, 칠하고, 붙이는 과정을 거친다. 작가의 작업이 디지털 세계에서의 제작 과정을 실제 세계에서 성실하게 복기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도 회화적, 조각적 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인간이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감각을 되돌리는 과정이 된다. 작가는 작업에 동원한 그의 모든 감각과 노동을 통한 제작 과정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으로 디지털 세계에서 벌어지는 감각의 모방에 역으로 접근한다.
<study of layers>는 디지털 편집창에서의 레이어(layer) 발생 과정과 결과를 실물화한 작품이다. 이 작업을 통해 작가는 디지털 화면 안에서 무한대로 쌓이고 겹쳐질 수 있는 레이어(layer)의 반복된 모양새가 실제 세계에서 어떤 모양이 되는지 보여준다. 이것은 일정한 두께와 질감을 감각할 수 있는 프레임의 반복 제작을 통해 인간과 사물 사이에 층층이 쌓인 보이지 않는 감각의 연구로 발전한다.
디지털 세계 안에서는 이야기와 삶이 파편화 된다. 비선형적인 시간 안에서는 내용의 연속성이 부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한 곳(시점)에서 다른 한 곳(시점)을 향해 나아간다는 개념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간의 산책하는 움직임과 걸음걸이를 이제는 재핑(zapping)이 대체했다고 말했다. 미래의 걸음걸이는 더이상 과거의 순례 또는 행진의 시대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며 물 속에서 유영하듯이 방향을 알 수 없는 흐름에 몸을 맡기고 부유하는 듯한 모습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인간이 세계를 조작하고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여기게 되면서 선형적 역사로서의 삶과 세계는 이제 인간의 손에 달린 원본-복제-변형의 반복, 그리고 새로운 버전의 반복으로 변화하였다. 이제 스스로를 편집자로 여기는 우리 모두는 의미를 잃어버린 세계로 향한다. 잘려진 시간 안에서 의미와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허공을 응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모두가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삶과 세계는 시간의 흐름과 연속성 안에서 서서히 발견되거나 천천히 다가오기도 하고, 한참 후에 그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여운을 느끼는 것,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 변화를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즉각적 편집이나 중단된 이야기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편집은 시선을 차단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디지털 세계에서 시선의 수동성은 실제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개인의 시야를 좁힌다. 빈지워칭(binge watching)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내재된 눈으로만 응시하는 수동적, 소비적 태도는 세계를 시각적 자극을 쫓는 관조적 태도로만 바라보게 만든다. 스크롤하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지금, 이것은 잘게 쪼개져서 어떻게 주워담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한 것 처럼 파편화된 인간의 원자화를 강화시킨다. SNS 속 세계에서 사진, 동영상, 사건, 정보를 편집하고 자르고 붙이는 과정은 서사적 연속성을 모두 제거해 버린다. 서사적 연속성이 없는 것은 얼마나 삶을 공허하게 만드는가. 맥락 없음은 우리를 커다란 그림, 커다란 흐름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있다. 나를 설명할 수 없고,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도 불가한 시대에 사는 인간은 빠르게 감각할 수 있는 것, 즉각적인 것, 직관적인 것, 모든 과정을 단축시키는 편집된 결과물에만 감흥한다. 처음도 끝도 없고, 밤도 낮도 없고, 기-승-전-결의 플롯도 없는, 현재에서 현재로, 이슈에서 이슈로, 정보에서 정보로, 지금에서 또 다른 지금으로만 이동하다가 불시에 종결되고 만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삶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의 연결성도 끊어버린다. 이야기 하나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거나 듣기 힘들어진 시대에 인간의 삶은 에피소드의 연속으로 해석될 뿐이다.
잘려진 시간과 편집된 이미지, 이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장입규의 작업은 <edited space(floating images)>와 <tangled timeline>에서 심화된다. <edited space(floating images)>에서 작가는 편집된 공간, 잘려진 시간의 컨셉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이는 <study of layers>와 연결되는 작품으로 동일한 크기로 구성한 일종의 공간 편집 기술을 실제화하고 있다. 편집한(edited) 화면이 실제적 공간감을 가지고 전시장 안에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고 연관없는 시공간이 나열되거나 부유한다. 작가는 편집한 이미지를 전시장으로 가져오기 위해 스케치하고, 물건을 선택하고, 가져오고, 자르고, 닦고, 문지르고, 붙이고, 꾸미고, 위치시키는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노동을 동반한 작업 과정을 거친다. 손으로 구현한 편집된 이미지는 실제적 두께와 무게와 질감을 담아 덩그러니 잘려진 채 전시장을 채운다. 공간을 무대 세트처럼 보이도록 조작, 배치하는 것을 통해 디지털 화면 안의 이미지가 언제든 편집, 삭제 가능한 성질을 내포하고 있음을 반영하였으며, 쉽게 철거하여 사라질 수 있는 공간으로 느껴지도록 의도하였다. 전시 공간을 채우는 7개의 파편적 공간 사이를 걸으며 디지털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삭제와 복구, 즉각적 편집 과정이 실제 세계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 생각하게 한다. <tangled timeline>은 이전 전시들에서 보여주었던 타임라인 바(timeline bar) 시리즈 작업을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선형, 선회한 기이한 형태로 변형시켜 선보인다. 이 작업은 총 48개의 아날로그 시계를 세 덩어리로 나눠 규칙없이 얽혀서 붙여놓은 작업으로, 각 시계는 제각각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 디지털의 시간 개념에 관해 아날로그 시계를 가져와 접근하는 작가의 질문은 시침, 분침, 초침의 어지러운 회전 사이에 숨겨져 있다. 시간을 읽는 도구로써 아날로그 시계가 드러내는 시간성이 그의 사물을 다루는 조각적, 입체적 방식 안에서 비유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작가는 이를 통해 디지털 시간성에 관한 실험으로 나아가고 있다. 48개의 아날로그 시계가 내는 초침 소리의 아우성은 SNS에서 벌어지는 맥락 없는 시간과 공간의 널뛰기처럼 우리를 또 다른 상상의 세계로 끌고간다.
matter matters. 사물의 본질, 우리를 이끄는 것,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을 수 있는 힘, 눈 앞에서 만질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 진짜인 것. 장입규는 디지털 화면 안의 ‘것’을 역으로 다시 모방하는 ‘것’을 통해 본질적인 ‘것’의 중요성을 설득한다. 그의 이러한 비유적 접근은 디지털화 되어가는 이 시대가 버리고자 하는 ‘사물’, 즉 자연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며, 실제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실제처럼 느끼는 것을 추구하는 디지털 시대의 경향성에 대한 성찰이다. 구조 자체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구조 자체에 접근하여 그것을 전복하거나, 무엇이 원본인가를 따져보거나, 구조의 선후를 규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는 주어진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 중심적 시선, 조작과 통제를 통하여 인간의 편의대로 방향을 설정하고 실현해 내고자 하는 인간의 궁극적 의도를 비판한다. 이러한 조작과 통제가 강화될수록 인간은 실제로부터 더 멀어지고, 경험과 감각의 풍부함으로부터 더 빈곤해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인간의 의도로 이루어 온 기술의 발전이 실재의 가치를 경시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인간이 몰두하는 테크놀로지의 진보에 관해 장입규는 그 실체를 현실로 가져와 거듭 감각하게 하는 방식으로, 어쩌면 이것이 불필요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drawing that obeys gravity>는 그림판에서 그리는 무작위의 그리기 행위의 결과물을 두꺼운 목재를 활용하여 재현하였다. 그림 연습을 표현하는 이 드로잉은 디지털 화면에서 끄집어 내어 공간에 매달아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배치 방식으로 실제 세계인 전시장 안에 매달린 채 중력에 순응하고 있다. <paint bucket(white)>은 포토샵의 작업 도구 중 ‘Paint Bucket Tool’을 활용한 화면을 구현한 작품이다. 작가가 수집한 오브제들을 자르고, 배치하고, 그 위에 사각의 윤곽선을 설정하여 하얀색으로 처리한 이 작업은 작가가 직접 흰색 페인트로 3-4회 칠해서 채운 질감과 흔적을 그대로 갖고 있다. 디지털 화면의 편집 기법을 빌려 온 이 작품은 세심하게 배치된 사물들과 흰색으로 채워진 윤곽선을 바라보는데서 시선의 즉각적 감각을 일깨운다. 디지털 화면에서는 윤곽선과 채우기 명령을 즉각적으로 되돌릴 수 있지만, 실제에서는 이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두 세계에 살고 있다. 디지털 세계와 실제 세계는 과학기술로 파생된 다양한 기기들을 다루는 우리의 지각과 감각을 통해 교차한다. 예술가가 자연을 모방하며 예술 작품을 창조하기 시작한 것을 생각할 때, 인간이 다루는 과학기술이 자연과 인간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디지털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기술발전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예술은 이 시대를 보며 어떤 가치를 말해줄 수 있는가. 디지털 화면 속 디자인 도구와 디지털 언어를 가져와 실제 세계에 구현하는 장입규의 작업 방식은 두 세계를 읽을 수 있도록 돕는 채널로서 역할하고 있다. 이 방식은 예술가가 어떻게 동시대의 현상과 이슈들을 해석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자연, 인간, 실제 세계의 경이, 놀라운 감각들, 그리고 이것에 관한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것, 그 경험의 범주가 좁아질수록 이 세계에서의 고유성을 잃어버린다. 기술발전이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을 무한히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는 전망이 우리의 손가락으로 조작하는 모방과 대체와 전복의 시도들을 가속화하고 있다. 자신의 의도를 담아 제작, 편집하여 창조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자의 자리에 예술가가 위치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장입규의 작업은 편집자, 창조자로서의 힘을 동경하기 보다 내려놓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물 위에 몸을 맡기고 있을때 경험하는 자유로움, 아침에 듣는 새소리는 예측 불가하거나 느리고 조용하기 때문에 실제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감각들이다. 이것은 디지털 세계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그 어떤 것으로 인간 실존이 분열되고 시간이 점적인 현재들로 해체될수록 점차 우리의 경험에서 멀어질 것이다. 전시 《디지털 강해》는 우리의 잃어버린 감각을 깨우고, 새롭게 다가올 감각의 재편을 예견하는 것, 잘려진 시간 사이를 유영하는 인간을 실제 세계 안에서 마주하게 하는 것을 상상한다. 전시는 아날로그 세계를 통해 디지털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도구로서 인간의 실존적 본질과 사물의 본질이 충만한 세계에 관한 커다란 질문을 감추고 있다. 작가의 비유적 접근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게 될 이 질문은 지금, 이곳에 머무르며,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이 될 것이다.
[1] 제목은 지그문트 바우만과 스타니스와프 오비레크의 대화를 엮은 책, 『인간의 조건』의 부제에서 가져왔다.
구조화하기: 해체와 재편의 목적
장진택(독립기획자)
예술이기에 취할 수 있는 미적 관점의 방식, 그것은 현실의 삶과 두는 일정한 거리감에 바탕한다. 구조를 구축한 것은 개별의 객체들이지만, 그 집단화의 과정 그리고 일체가 되려는 체계의 본능에 의해 이들 객체 혹은 주체들의 입장은 때로 신기루가 된다. 그리하여 이른바 시스템은 자기 조직의 견고함을 지속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구성원들은 그들의 합의로 사회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망각... 아니,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걸 허락받았다. 그로부터 공통의 집합 결사체는 복잡한 제 구조의 속성을 감당할 만큼의 다양성, 또한 이러한 다양성을 가능케 하는 더 섬세한 결과 도출의 과정을 스스로 포기해 버린 상황을 스스로 초래했다. 사회라는 범주는 그렇게 자율성을 획책했고 계속해서 자신을 고도화해 왔다. 이제 그 구성원들인 우리는 이 사회가 결정 내려 준 삶의 목적을 목표해 가면서 그로부터 내 존립의 근거를 발견하는 데 급급하다. 거대 구조의 운용에 일개의 개인이 직접 관여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긴다. 효율을 위해 책임은 분화하고, 이렇게 부여된 사회적 책무에 모두는 종사한다. 그 척도의 합리성을 헤아리거나 수정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며, 이미 어떤 양식으로서 자리하는 형성체 자체를 어떻게 잘 수용할 것인지가 존재 이유가 되어 버린 것이 바로 지금의 시스템이다. 사회, 좀 더 너른 범주에서는 시대와 같은 차원의 구성을 해제하면서, 동시에 해당 체제의 유지와 지탱의 요건을 얼마나 (타인보다) 빠르게 이해하는 것이 일신의 안위를 보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보통의 논리 공식을 개관하자면 바로 그러하다.) 자기 정화를 위한 최소한의 순환 작용을 위한 어떤 틈이나 여유 시공으로서 집단 조직의 경향은 변화의 요인을 용인한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패러다임이나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생성하는 계급의 집권 문제가 마냥 평화롭게 구성원 전원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이상적 형태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때문에 개인의 인식이 작동하는 원리와 방식을 설정하는 일이 곧 불안에 기초하는 자존, 나아가 그것이 자아인 동시에 한 그루의 분화형 개체로서 매개된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방지하고 행복과 같은 개인의 욕구와 욕망의 실현에 집중토록 함으로써, 그 상위 수목 구조의 생명을 보전하는 필수 요소로 삼는다. 근대의 도래에 큰 역할을 한 과학이나 제도, 합리나 이성과 같은 부분이 과연 어떤 형상의 위상으로 귀결하게 할 것인지, 그 기하학을 밝히는 일이 모던(Modern)의 흐름에서 주요했던 이유도 이 체계 보전의 성질에 기인하고 있다. 다시금 거리두기의 수행으로 돌아와 보자. 그 중요성을 가늠하는 일은 당대의 예술, 그 사회 참여의 가능성과도 실은 연관이 있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이를 통해 전하는 미적 의미와 가치의 크기와 너비, 무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토록 무겁고 거대하며 넓고 웅장한 체계나 구조에 필요한 균열을 일으킬 방법이 오로지 그 외연의 면면과 반드시 상응해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만약 세계와 주체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 더불어 그 사회 참여를 위한 행동을 미술이 수행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역시 시의적으로 분명 바람직하고 적합하다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보이는 것, 어쩌면 일말의 인공적 가상체(Simulacre)에 불과할 수도 있는 그것에 매몰되지 않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 원본의 구조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로서 미술은 구조의 해제를 한 번 더 시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장입규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그렇듯 당대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단지 이 구조를 파악하는 단계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어떠한 의미나 가치로 받아들여야 할 건지, 그 사유의 단적 결론을 작품으로 승화한다. 그렇기에 작가가 꾸민 예술작품은 단일하고 응집된 방식으로 자기 의미와 가치를, 더불어 그로부터 개입하는 개별 자아의 체험과 삶에의 적용이라는 다단하고 복잡한 심적 과정에 일부 영향을 선제적으로 가정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건, 그의 작업에 서린 태도와 어조가 일반적인 전수의 수행에서 취하기를 요구하는 반성이나 교훈의 양태, 또는 예술의 범주를 거름망 삼아 조장하는 의심이나 비판을 통한 공격적 변화를 꾀하는 식과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작가의 작업은 집단적 사회 구조의 상위 단에서 개별 주체의 삶에 달하는 하위 층위에 이르기까지 합의라는 명목으로 행하는 통제의 무형적 권위를 마주하는 개인의 입장을 대변한다. 문제라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실제 어떠한 방식으로 다루고 수용할 것인지, 그렇다면 그 인식의 범위와 깊이는 또한 어떠해야 할 건지를 고민하길 장입규의 작업은 돌이키라 하는 거다. 관계란 언제나 성찰의 의식을 함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같은 인식의 방향성을 상기함으로써 그는 ‘나’라는 존재가 현실에서 존립하기 위한 최소한이자 근본적인 원초의 철학적 조건으로서의 그 안팎을 구성하는 기반적 원리를 살필 것을 권한다. 그 구체적인 방안 모색의 실마리가 되는 개념이자 형식은 질서다. 질서란 본디 혼란이 없고 순조롭게 이뤄지는 사물의 순서나 차례를 뜻하는 말로, 이 질서의 논리가 있기에 개인은 남들과는 다른 고유한 개체로서 개인을, 집단은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어떤 개별자들의 모임으로서 집단을 성립도록 할 수 있다.[1] 이로써 장입규는 구축된 질서의 가능성을 예비한다. 다만 이 질서의 작동은 개인이 아닌 개인들, 그 집단적인 권한 행사에 의해 이뤄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가 가시화하는 질서의 양태는 선제적 길잡이를 위한 예시의 기능을 자처한다. 작가가 추동하는 극단적인 일종의 ‘이케아–형(IKEA-type)’ 미적 양식이 전시의 상업적 디스플레이와 유비하는 것은 어쩌면 그와 같은 연유에 기인할 테다.[2] 그러한 가시화 전략을 통해 장입규의 세계관은 크게 세 방향으로의 관계망을 조성하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자아와 사회와의 관계가 그것이며, 다른 하나는 타자와 사회와의 관계, 마지막 하나는 사회의 범주를 중심으로 새롭게 편성되는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다. 다만 작가의 경우, 그의 작업 그 자체를 과정의 결과로써 표상하기보다 이미 이상의 관계성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도출한 이후의 결괏값으로 귀결하는 데 좀 더 초점을 맞춘다. 그 때문에 작가의 작업은 특정한 사상을 최고의 상태로 끌어올린 이상적 상황의 전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현시하는 이상이라 함은, 발전적 사관을 지지체 삼는 변증법적 체제를 따르는 대신 진실로 현실에서 도달할 수 있을 일정 정도의 균형 상태를 발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렇게 그는 이룰 수 없을 절대적 이상이 아닌 최소한 미학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실현으로서 다다를 수 있을지 모를 상대적 이상을 밝히는 데 집중한다.
장입규의 작업에서 주요하게 사용되는 물적 방법론은 바로 잘라내고, 붙이는 행위로 특징적인 건 이와 같은 수행이 동시대로서의 디지털 세계에 안에서 통용되는 일련의 편집 방식을 현실 세계에서의 조형 행위로 치환하는 것과 다름없다. 다시 말해 디지털의 편집 기법과 이를 기반하는 전략 그리고 그 의미를 현실의 시공에서 아날로그적으로 이미지화하는 과정 자체가 곧 작가 작업의 표지라 하겠다. 다양한 장면의 콜라주(college)를 통해 디지털 행위의 수행이 어떻게 아날로그적으로 재현될 수 있을지를 탐색하는 상대적으로 초창기 작업인 〈케이블(원제: Cable)〉(2019)로부터 이상의 방법론이 작업화하기 시작한다. 2020년 작 〈페인트 통(원제: Paint Bucket)〉에서 작가는 디지털 환경과 현실을 잇는 스크린을 상정하는데, 이는 우리가 창 안쪽의 세계를 창밖에서 바라볼 때 감각하는 특유의 평면성을 닮았으며, 이는 마치 현상된 사진 이미지를 보는 것 같은 착시의 디스플레이를 차용함으로써 구현된다. 일정한 장식으로 연출된 가상의 세트는 분명 실재계에 위치하지만, 특정한 지점에서 그것을 응시하는 주체의 감각은 어쩌면 디지털과 아날로그 그 사이 어디쯤을 향한다. 착시의 효과를 통해 삼차원(3D)과 이차원(2D)의 감각이 상호 전환할 수 있는 무엇임을 체험함으로써, 관람의 주체는 비로소 우리에게 내재한 감각의 층위가 불변하는 것이 아님을 돌이킬 기회를 제공받는다. 그 이듬해의 작업 〈자르고 붙이기(원제: Cut and Paste)〉는 제목에서부터 무언가를 자르고 붙이는 행위의 수행성을 공표한다. 원래는 오롯한 원본의 이미지로 존재했던 레디메이드 오브제들을 실제로 파편으로 오리고 다시금 붙이는 와중에 형성하는 균형의 미감을 좇아내며 작가는 완성된 단일체에 내재하는 근원적 불완전성을 폭로하는 한편, 다양한 조합의 수를 두고 발생 가능한 새로운 문법의 수립을 꾀한다. 본 작품의 연작이라 할 법한 〈편집의 미학(원제: Aesthetics of Editing)〉(2022)은 기본적으로 전작과 유사한 식의 시각적 구현을 펼쳐내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무게의 중심을 아날로그화로부터 디지털화 혹은 디지털의 실재화라는 차원으로 적극 이전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상징(icon) 형태의 기호를 떠올리는 반복적인 도상의 활용이 한층 도드라지며, 상호 이질한 이미지로서의 오브제들을 설치하는 방식도 수평과 수직을 구조하는 선형적 배치를 따르기도 한다. 이후 개인 컴퓨터 바탕화면을 스크린 캡처(Screenshot)하여 실재의 형식으로 구현한 2023년의 〈데스크톱(원제: Desktop)〉 작업이 바로 앞선 이 두 작업을 이것의 예비로 여기게 한다. 형성된 인식의 감각을 재편하기 위한 시도로서 장입규가 행하는 다른 하나의 양식은 순수 미술의 부문을 실용의 그것과 혼재하여 성취한다. 2021년 작 〈시간선(시계)(원제: Timeline (Clock))〉에서는 미니멀한 시계를, 2023년 작 〈블록체인(원제: Blockchain)〉에서는 전통적 아라비아풍의 카펫을, 동년작 〈현대적 도구들(원제: Modern Tools)〉에서는 문구 집기를 표방한 컴퓨터 운영체제를 대표하는 아이콘 형상의 청동 조각들을 작가 고유의 디자인적 조형성을 투사해 보인다. 이처럼 시각적 재현의 미감이 현실의 시공에서 부각되면 부각될수록 이를 관통하는 보통의 지각과 인식에 있어서 어떤 양극적 괴리를 환기할 수 있게 의지하는 정도라는 것도 함께 증폭하게 된다.
이렇듯 장입규는 디지털 기반의 가상 환경에서 통용되는 수행 양식을 이미지화하여 이를 현실의 세계에서 실재의 형식으로 구현한다. 그 가운데 전자의 미학과 편집적 수행성이 조형의 문법으로 이첩된다. 물리적으로 전시된 현장의 설치는 실은 원본이 존재하는 일차 이미지의 조작된 이차 이미지일 뿐임을, 하지만 그 어느 쪽을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다시금 우리의 지각과 인식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촉구하는 식으로 작가의 작업은 존재와 그 주변을 환기한다. 작가가 향하는 점진적 질서화의 예시는 마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의 입장에 비견하게 무언가를 안다는 사실이 과거의 그것과 유사할 것이라는 일상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3] 보통의 영역에서 어떠한 가정을 통해 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을 인지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어느 측에서도 최대한 거부감 없이 사유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은 예상보다 언제나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안정된 관계의 상정으로서 보이지 않는 블랙박스(Black Box)의 구조를 폭로하는 일은 단지 그 알 수 없음의 장치를 실제로 분해해서 해체하는 형태로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단수의 상황을 복수의 것으로 이전하고, 그 변화의 과정에서 인식 또한 달라질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처럼 일대일 대응을 다수의 갈래로 확장 대응하면서 작가는 전파된 혹은 관찰된 사실의 신뢰도를 무화한다. 그리고 이 수행의 과정은 최대한 자연스러울 때 분명 더 효과적일 수 있다.
[1] 각 단어의 뜻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참조.
[2] ‘이케아–형’이라는 단어는 1943년 설립된 스웨덴의 가구 제조 기업인 이케아(IKEA)가 지향하고 제안하는 스칸디나비아 라이프스타일 기반의 특정한 인테리어적 미감을 지칭하기 위해 필자가 만들고 뜻을 붙여 쓴 조어다.
[3] 이에 관해서는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과 관련 문헌을 참조할 것.
《네 행복은 스크린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상미 (space xx 큐레이터)
때때로 디지털 화면 속 이미지를 실재reality로 인식해야 하는지, 가상virtual reality으로 인식해야 하는지 그 존재의 정체성이 궁금할 때가 있다. 실재하는 현실 속 이미지는 가상이 모방하는 존재인지, 가상이 나타남으로써 실재를 증명하는 역설을 함축한 존재인지 말이다.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이 디지털 시스템으로 전환되고 그것을 구축하고 활용하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 현재에, 작가 장입규는 오히려 그 대척점에 있는 아날로그 방식을 작업의 방법론으로 채택해 디지털 환경의 프로세스를 물리적인 방식으로 번안한다. 작가의 작업은 오늘날 디지털 이미지와 기술을 소비하고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근간으로 하며 이러한 태도는 이번 개인전 타이틀 《네 행복은 스크린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의 한 문장으로 함축된다. 이는 이성복(1952-) 시인의 에세이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의 제목을 차용한 것으로, 디지털 환경 안에서 질서가 깨졌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나 우울감 등 디지털 매체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우리의 모습을 빗대며 비대해진 디지털 기술과 미디어 사용을 역설적이고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네 행복은 스크린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전에서는 오늘날 디지털 시스템이 갖는 주체성과 디지털 가상이 현실 세계와 전복되었을 때 얻어진 원본original의 의미, 그리고 디지털 문법을 물리적 공간에서 노동력이 수반된 작업 방식으로 번안하는 작가의 태도에 주목하며 원론적이지만 유의미한 질문이 발생하는 지점과 그 행간을 살펴보고자 한다.
장입규의 작업은 대상을 해체하고 기호화된 이미지를 실재화하며, 부재를 통해 현전을 증명한다. 이전 작업이 버려진 사물을 발견하고 수집해 디지털 편집 프로세스인 자르고cut 붙이는paste 과정을 거쳐 본래 사물이 가진 의미와 맥락에서 독립된 또 다른 원본을 창출하는 것이었다면, 최근 작업은 디지털 편집 프로세스를 이용하는 방식은 동일하게 유지하되 디지털 시스템과 이미지, 문법 등 비물질적인 대상이 매개가 되어 디지털을 모방한 실재가 등장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네 행복은 스크린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전에서는 이같이 작가의 탐구 대상과 개념의 확장을 중심에 두고, 더 이상 버려진 (원하는) 오브제를 수집하기 어려운 환경과 빠르게 유입되는 디지털 기술, 매체에 적응하며 또 다른 방향성을 모색한 작업을 제시한다. 이로써 기존의 작업 방법론에서 디지털 메커니즘을 도입하는 것으로 방식을 확장하며 디지털 가상과 현실 세계와의 상관관계를 구체화하며 그 실체를 드러낸다. 디지털 영상 편집 프로그램의 타임라인 바timeline bar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품 <timeline(clock)>(2021)은 시간을 자르고 붙이는 일련의 과정을 아날로그 시계로 제작해 기이한 형태의 조형성을 내세우며 현재의 좌표로 재구성한다. 각각 다른 시간의 덩어리를 품은 화면 안에서 시침, 분침, 초침은 각자의 속도로 돌아가며 불규칙한 여백으로 발생한 시곗바늘의 부딪침과 멈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간극과 상충을 은유한다. 디지털 이미지의 부피를 인지하는 시지각에도 간극이 발생하는데 <study of layers>(2022)는 디지털 편집으로 해체되고 재조합된 이미지가 많은 단계를 거침에도 불구하고 공간감을 상실한 채 평평하고 납작한 결과물로 보여지는 지점에 주목한다. 디지털의 편집 과정을 시뮬레이션하며 실제 공간에서 오브제를 자르고, 붙이고, 레이어를 쌓는 과정을 거쳐 층과 두께를 물리적으로 감각할 수 있도록 구현한 이 작품은 디지털 문법을 차용한 조각적 해석이 반영되어 보는 각도에 따라 엇박자를 내며 시지각적 간극을 발생시킨다. 디지털/인터넷 프로그램에 적용된 대부분의 아이콘이 현실 속 사물이나 자연 이미지에서 기인한 디자인이라는 것을 포착한 작가는 이를 실재화하는 실험을 통해 대상이 속한 위치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변화하는 속성을 가시화한다. <modern tools>(2023)는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프로그램 등에서 빈번히 다루는 툴tool을 재현하며 디지털 환경에서 유용하지만 현실에서 사용할 수 없는 이미지(도구)를 단단한 모양을 갖춘 오브제로 드러낸다. 용도를 상실하고 기호적 의미만 남은 이 오브제는 현실-가상-현실로의 번안을 거듭하며 실체의 허구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파생된 <visible and invisible>(2022)에서는 디지털 아이콘이 단순히 현실을 모방한다는 한계에서 벗어나 디지털 환경 자체에서 새롭게 생성된 기호를 발견하고 이를 물리적으로 재현함으로써 현실에서 그 용도와 쓸모를 찾아보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 외에도 최근 열풍이었던 NFT에 관한 작가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 <blockchain>(2023)은 디지털 자산의 소유주임을 증명하는 블록체인 기술을 단어 그대로(block+chain) 가시화하며 작품이 갖는 원본의 의미/가치와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디지털 시장을 풍자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공통적으로 복잡다단한 단계를 거친다. 그 과정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의 간극을 발견하고, 이는 또다시 변증법적으로 변화하며 두 사이의 교차점을 찾게 된다. 수많은 공정을 수행하듯 행하며 얻어진 결과물은 결국 디지털 이미지의 속성과 같이 매끈한 만듦새를 지니며 새로운 가치를 전유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무용(無用)한(것 같은) 오브제는 고유한 서사를 지닌 또 하나의 원본으로 디지털 시대의 기술의 본질을 비틀며 작품으로서 당위성을 공고히 한다.
한병철(1959-)은 그의 저서 『사물의 소멸』에서 “디지털 속 시간에는 어떠한 서사적 연속성이 없어 삶을 덧없게 만든다.”라고 언급하며 탈사물화 되어가는 현재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진단한다. 장입규는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전환하는 시대상에 역행하며 서사적 연속성이 없는 디지털 메커니즘을 현실 세계로 이끌어 부재한 서사와 가치를 만들어 내고자 많은 시간과 품을 들인다. 그 과정에는 작가가 주체적으로 발생시킨 고단함이 단단히 배어있으나, 결국 이 고단한 작업을 통해 디지털 가상과 실제 공간은 분절되고 유리된 것이 아니라 공통분모를 가진 모종의 관계이며 이 둘이 만나는 교차지점에서 새로운 서사가 발생할 수 있음을 또 다른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전시 《네 행복은 스크린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의 작품들을 마주하며, 작가가 만들어 낸 날카롭지만 위트 있는 새로운 서사의 실체에 깊숙이 발을 들여보자. 그리고 그 실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를 객관화해 보며 디지털 시대로 전환해 가는 과도기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나의 지각과 감각이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 반추해 보자.
「유령화된 존재로서 이미지를 (능동적으로)거부하기」
권시우(비평가)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됐다는 전제는, 어느새 클리셰처럼 소비되고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사용자로서의 주체가 이미지에 보다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가설을 토대로, 우리의 ‘확장된 자율성’에 호소한다. 그러나 ‘확장된 자율성’은 사실상 개별 이미지와의 관계(성)에 종속돼 있을 뿐이다. 만약 이미지가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면서, 한때 우리를 주체로 규정했던 사용자라는 정체성을 압도한다면 어떨까? 실제로 웹 상에 산개해 있는 이미지의 잔해들은, 알고리즘의 역학에 의해 거의 실시간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사용자가 미처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이는 자연스레 (사용자 편의성이라는 기치 아래) 사용자를 소외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주체의 관점에서 이미지를 개별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하기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확장된 자율성’은 사실 알고리즘이 사용자에게 제공한 이미지와의 지엽적인 관계를 대변하는 레이아웃의 형식에 가깝다. 우리는 그러한 레이아웃 속에서 이미지를 (사용자 편의적으로) 식민화하는 과정에 몰두한 나머지, 그것을 추동하는 권력 의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여지에 대한 논의를 유보하고 있다. 즉 우리가 사용자로서 이미지에 선행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에 따라 이미지를 남용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일상 차원에서 기꺼이 수행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미지와의 위계를 지속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권력 의지는 (사용자에 선행하는) 레이아웃에 의해 규정된 허구에 불과하다. 달리 말해 사용자는 오로지 레이아웃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주체로 자각할 수 있는 허구적 존재에 가깝다.
장입규는 얼핏 그러한 허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cut and paste>(2021)로 대변되는 근작들은, 작가가 자신의 일상을 배회하면서 다소 무작위하게 수집한 사물들을 이미지와 대응시킨 채, 각기 다르게 편집한 결과다. 이는 (알고리즘에 의해 호명된) 사용자의 관점을 토대로 사물들의 이해관계를 재/구성하면서, 앞서 논의한 레이아웃이 이제 현실마저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레이아웃이 광범위하게 확장된 상태는, 결국 우리가 여전히 주체성을 권위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허구를 증폭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사용자는 언제나 주체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디지털 기술은 그러한 상태를 점차 가속화하는, 즉 우리가 스스로를 주체로 호명하기 위한 가능성의 영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종의 촉매로 기능한다.
그러나 일련의 작업들은 단순히 사물-이미지를 유희적으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과정을 왜곡시키는 데 주력한다. 즉 작가가 사물을 이미지 차원에서 편집하는 행위는, 그것에 내재된 상품으로서의 사용 가치를 위반하려는 시도이며, 이로써 사물은 레이아웃 속에서 자신의 환영성을 부각시킨다. 문제는 이때의 환영성이 작가에 의해 편집된 사물들의 (사용 가치와 무관한)이해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상품이라는 물신을 해체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레이아웃이 조성한 이미지의 영토를 재편하려는 권력 의지의 무용함을 폭로하기에 이른다. 즉 이미지를 답습한 사물들의 이해관계가 환영이라면, 결국 주체의 식민화 전략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무단 점거함으로써 주체성을 확증하는 모순적인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침내 주체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자각하게 된다. 즉 <cut and paste>는 사물이 현전하는 상태와 그것을 거듭 유보시키는 이미지의 역학 사이를 가늠하게끔 유도하면서, 레이아웃에 종속된 주체의 제한적인 시야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러한 인지적 혼란은 우리가 사용자의 권한에 자족하지 않은 채, 레이아웃의 외부에 기꺼이 편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주체를 계승하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낙관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레이아웃의 외부는 (주체와 무관한) 이미지의 잔해들로 과포화된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그곳은 알고리즘에 의해 계속 증식하는 이미지들이 초래한 폐허이며, 결국 개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미지의 총량은 인지적 혼란을 넘어서, 자아라는 합의의 형식을 와해시킨다.
그러한 파국은 <Social Network Service>(2021)에서 이미 예견돼 있었다. 해당 작업이 작가의 타임라인에서 다소 예외적인 이유는, 바로 이미지와 부합하려는 개인의 불확실한 실존을 직설적인 방식으로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공간 상에 평행하게 도열해 있는 의자들은, 그것들과 마주한 각각의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촬영되고 있고, 관객은 그런 식으로 연출된 장면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다. 문제는 관객이 임의적으로 선택한 의자에 착석하는 순간, 관객 정면의 스크린이 송출하고 있는 사분할된 의자의 이미지로 수렴된 채, 자신의 신체 일부를 노출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작가는 카메라로 대변되는 ‘기계의 눈’에게 감시당하기를 자처함으로써 이미지 차원에서 비/자발적으로 편집된 신체를, 지금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SNS의 맥락 속에서 제시하고 있다.
편집된 신체는 한때 그것이 담보하고 있던 인간의 물리적인 형태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점차 고어gore해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고어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편집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관객은 여전히 멀쩡하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관객이 스스로를 유사 고어물로 소비하게끔 유도하는 상황이며, 이는 ‘기계의 눈’을 향한 노출증적 감각의 선정성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감각이 사실상 폐허에 가까운 이미지의 생태계에서 부/적응하고 있는 자아에 의해 조형된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결국 편집을 명목으로 스스로를 훼손하는 장면을 관망할 뿐인 탈주체의 유령적인 상태를 지향할 수 밖에 없는가? 앞서 <cut and paste>가 사물-이미지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드러냈던 감각의 틈새는, 우리가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 주체의 관점에 빙의할 것을 요청한다. 즉 사물의 환영성은 이미 탈주체화된 개인과 의도치 않게 공명하면서, 환영이 현전하는 상태를 가시화할 수 있는 개인의 역량을 토대로 주체성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아보다 비대해진 이미지의 총량을 수용할 수 없지만, 그와 별개로 이미지가 (레이아웃을 초과한 채) 현실로 유입되는 문제적 상황에 대한 증거로 사물의 환영성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는 환영을 무려 객관적으로 합의하기 위한 발단이며, 합의가 원만하게 전개될수록 주체로부터 소격된 유령은 자신의 존재론적인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즉 유령이라는 존재는 ‘기계의 눈’이 미처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대상으로 거듭난 채, 자신을 이미지로 재현하려는 자동화된 방식을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때 감각의 틈새가 요청했던 주체의 관점은, 사실상 자아로 대변되는 통합적인 주체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유령의 의지를 발생시킨다. 일련의 작업들은 그러한 강령술을 위해 사물-이미지를 제의적 도구로 활용하면서, 다름아닌 우리를 반복해서 유령으로 초대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초대에 어떻게 화답할 지는, 아직까지 미결의 문제로 남아있다.
[2022아트경기] 작가-평론가 매칭 프로그램
최정윤(독립기획 및 비평가)
싸이월드에 미니룸이라고 각자의 미니홈페이지 안에 작은 방을 꾸며 만들어놓을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이 있었다. (요즘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플랫폼으로는 네이버의 제페토나 아크버스가 있다.) 가상공간에서 나를 대신할 아이콘의 머리모양, 옷, 표정 등을 고르고, 말풍선에 하고픈 말도 적어 넣는다. 실제 내 방이 어떻든 상관없이, 미니룸에는 내가 좋아하는 가구와 사물들로 가득 채워 넣을 수 있다. 우리는 실제 삶의 공간보다 더 빛나고 아름답고 귀엽게 미니룸을 꾸밀 수 있고, 나의 취향을 누구에게나 보여준다. 이곳은 현실에서 하기 어려운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고의 과정을 정 반대로 뒤집어, 미니룸이 진짜라고 상정하고,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 미니룸의 모습을 똑같이 펼쳐 보이는 걸 상상해본다. 상상만으로도 꽤 흥미진진하다. 현실세계에 펼쳐진 가상세계 말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된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10여 년 정도 사용했을까? 스마트폰을 쓰기 이전의 삶이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중독되어 기술에 푹 길들여져 있다. 녹음기, 사진기, 전자사전, 지도 등을 따로 들고 다녔던 때가 이제 아득하게 느껴진다. 인류가 편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발명품들인데, 기계에 의존하면 할수록 그에 맞춰 인간이 가지고 있던 몇몇 능력들이 퇴화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제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컴퓨터 화면을 보며 보낸다. 일을 하거나, 소통을 하거나, 심지어 여가시간을 보내면서 말이다. 걸어 다니고 땀을 흘리면서 누군가와 부딪치는 현실의 경험이 아닌, 2차원의 평평한 화면을 응시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화면 너머의 세상에서는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쉽게 분간해내기 어렵다. 사진은 쉽게 조작되고, 아무 것도 아닌 삶을 그럴듯하게 꾸며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장입규는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넘나들며 관객으로 하여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작품이 전시의 경우, 직접 전시장에 와서 관람하는 관객만큼이나, 온라인에서 작품 이미지로만 접하는 경우도 많다. 사진이 실제작품보다 더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 보지 않으면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장입규의 작품은 후자에 속한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깔끔하게 잘린 오브제들이 선에 맞추어 배치되어 마치 2차원의 평면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자리를 옮겨 측면에서 작품을 관람하면, 그것이 3차원의 오브제로 이루어진 부조, 조각, 혹은 설치 작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우산, 시계, 옷걸이, 신발 등 형태가 명확한 오브제들을 선택해 그라인더나 칼, 톱으로 자른다.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와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클릭 몇 번이면 끝날 간단한 작업이지만, 실제 사물을 이용해 자르는 일은 굉장한 시간과 물리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 <desktop>(2020)은 우리가 컴퓨터를 켜면 바탕화면에 보이는 아이콘을 현실세계로 동일하게 끄집어내 재구현한 작품이다. 산의 모양을 담은 이미지 아이콘, 종이폴더 모양을 따라한 폴더 아이콘, 그리고 실제 휴지통까지. 그는 온라인, 디지털 환경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직설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이미지-퍼즐-놀이 한번 해보지 않으시겠어요?
신보슬(큐레이터)
쉽게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째깍째깍 시간은 흐르고, 깜빡깜빡, 빈문서의 커서는 압박해오는데,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멍하니 깜빡이는 커서만 보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쉽게 쓸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근거를 찾기 위해 나는 다시 그가 보낸 포트폴리오와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기로 했다. 작업 속 이미지를 꼼꼼히 글로 옮겨보기로 했다.
1. <Aesthetics of editing>, 다양한 오브제, 라인테이프, 페인트, 나무각재, PVC 필름, 색지, 잉크젯 프린트, 액자 가변설치, 2022
벽면은 하늘색 라인테이프로 구획되어 있고, 그 위에 다양한 오브제들이 줄지어 놓여있다. 조각난 시계, 잘려나간 옷걸이, 부러진 지팡이 손잡이와 구두주걱, 화장실 표지판과 빗자루. 이 맥락 없이 선택된 듯 보이는 오브제들이 가이드 라인에 맞춰 열을 서 있다. 같은 오브제들이 반복되는가 하면, 잘려나간 오브제의 조각이 뜬금없이 벽 한귀퉁이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벽걸이 시계는 빨간색 색지로 가려져 있는가 하면, 노란색 포스트잇 같아 보이는 색지들이 줄지어 늘어선 가운데, 색지 위에서 반복되는 옷걸이 이미지는 의외의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점선으로 된 사각형의 박스에는 댕강 난 벽시계의 일부가 천연덕스럽게 들어가 앉아 있고, 나란히 일렬로 정렬된 빨간색 사각바구니와 프라이팬, 효자손, 빗은 가이드라인 아래 부분은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밑동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모습이 어딘가 낯익다. 폴더에서 파일을 불러와 가볍게 자르고, 복사하고, 붙이고, 지웠던 디지털 이미지 편집, 포토숍의 편집화면을 닮아 있다. 그러고 보니, 점선으로 된 박스형태의 이미지, 하늘색 가이드라인은 관람객에게 던져준 힌트였다. 디지털 편집방식의 프레임을 가져와 실제 오브제를 배치하여 현실공간 안에 물리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진철함이었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보기 위해 때론 솔직하고 과감한 인정이 필요할 때도 있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관객에게 본인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를 쓰고 있었고,
그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 말고, 좀 더 근사한 맥락을
만들어보겠다며 혼자서 이런저런 수식어구를 더해보기도 하고, 이론가의 인용구를
덧붙여보기도 했지만,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느낌에 불편했다. 결국,
보이는 그대로를 보기로 했다. 작가가 보여주기로 했던 그 부분을 집중해서 보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벽면에 배치된 오브제들이 음악처럼 보였다. 분명 단단한 물성을 가진
오브제였지만, 작가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 벽면에 배치된 오브제들은 형태로, 색깔로,
텍스쳐로 다가왔다. 작가의 예민한 미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과중한 의미부여의 고질병에서
벗어나면 작품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다시한번 느꼈다.
1-1. <umbrella>, <cane>, <folding rule>, <rope>, 잉크젯 프린트, 2019
흩날리는 듯 파편화된 오브제 배열 사이에 있는 네 개의 사진 이미지는 마치 주변에 있는 오브제들이 이후에 어떤 식으로 완결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 같다. 잘린 나무막대기, 의자, 가구, 천조각들로 3차원 설치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평면으로 보이는 각도를 찾아 촬영한 이 네 개의 사진들이 자연스럽게 외부에 설치된 오브제들과 이미지적으로 연결시킨다. 2021년 작품인 <cut and paste>의 경우, 일상에서 찾은 오브제들을 잘라 모눈의 벽면에 비치하는 데 그쳤다면, <aesthetics of editing>에서는 모눈격자를 디지털 편집창과 닮은 프레임을 만들어내고, 그 위에 이미지를 배치함으로써 디지털 편집과 현실관계에의 연결점을 잘 드러낼 뿐 아니라, 오브제들 설치에서 사진으로 만들어진 과정의 시간, 앞으로 편집 가능한 시간까지도 시각화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1-2. <the chair that no one can sit in>, 다양한 오브제들, 2019
검은색 의자. 그 앞에 길고 좁은 사각의 프레임이 보인다. 위쪽 옷걸이 같은 곳에는 수건이 걸려있고, 바닥에는 검은색 여성구두가 놓여있다. 가지런히 놓여있지 않은 것을 보니, 외춣했다가 급히 들어온 모양이다. 구두 뒤로 벽에 기댄 작은 액자가 보인다. 다시 보니 작은 거울같기도 하다. 이 좁고 긴 사각의 프레임 양쪽으로 의자가 보인다. 의자 앞쪽에 거울을 세워 둔 것인가 싶지만, 옆으로 살짝 비껴 보니, 의자를 잘라내고, 벽과 바닥에 비스듬히 나무프레임을 설치한 후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설치였다. 제목처럼 그 의자는 ‘아무도 앉을 수 없는 의자’였다.
프레임
장입규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프레임에 주목해야 한다. 초기 영상작품에서부터
설치, 사진작업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에서 프레임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것의 허점을 드러내는 장치이자, 디지털 세계로 나아가는 창이고, 작품을 읽어내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프레임 바깥과 프레임 안. 프레임으로 구분되고 단절되는 세계들을
연결해주는 창구이기도 하다.
2-1. <Social Network Service (SNS)>, 의자, 카메라, 컴퓨터, 빔프로젝터, 삼각대,
인터렉티브 실시간 비디오설치, 2021
네 개의 의자가 나란히 놓여있고, 각각의 의자 앞에는 삼각대 위에 올려진 카메라가 있다. 관객 앞에는 관객이 앉은 의자와 동일한 의자 화면이 보인다. 관객이 의자에 앉으면 화면 속 의자는 사라지고, 4분의 1만큼의 관객의 모습이 드러난다. 나머지 의자에 모두가 앉아서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지만, 그마저도 온전한 이미지라 부르기에는 한계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디지털 매체를 중심으로 한 비대면 소통의 시기를 빗댄 이 작품을 통해서 제한적이나마 관객의 참여로 완성되는 실시간 소통을 기대했다고 작가는 말했다.
다시 한번, 프레임
<Social Network Service>는 아주 단순한 인터렉티브 설치작품이다. 작가는 가상과 현실,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에 방점을 찍어 이 작품을 설명하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두드러지는
것은 사각의 프레임이다. 네 개로 쪼개진 프레임. 부분밖에 보이지 않는 프레임 안에서
참여자는 부분의 역할을 다하여 전체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4분의 1씩 기능하면서 만들어지는
시각이미지는 온전한 개체의 즉각적인 반영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하고 어색한 이미지
일 수 있으나,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시각적 즐거움은 그 어색함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이미지-퍼즐-놀이에로의 초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보면 다양한 관심사와 실험적인 태도로 인해서 일관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장입규의 작업은 다양한 형식실험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초기작에서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세상(가상세계)과 현실 세계와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드러내는 시각적 이미지 구현이라는 주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디지털 세계에서 자르고, 복사해서 붙이는 것이 자연스럽듯,
본인의 과거 작업을 자연스럽게 불러오고 조금씩 변형해서 새로운 작업에 이식한다. 그
과정에서 물리적인 오브제가 가지고 있는 물성들을 가볍게 날아가고 관객은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각적 형태를 오롯이 즐길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종종 예술이라면 뭔가 의미심장한 작가적 의도와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곤 한다. 이맛살을 찌뿌리고 심각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은 어렵다고 쉽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좀 더 가벼울 수 있다고, 그 의미라는 것이 형식적인 실험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장입규의 작업은 이야기한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즐기고, 이미지
퍼즐 놀이에 한 번 빠져봐도 되지 않겠느냐며 작품으로 초대한다.
“이미지-퍼즐-놀이 한번 해보지 않으시겠어요?”
씨알콜렉티브 <장입규: 누가 우리 귀여운 코끼리의 코를 잘랐나.>
조새미(미술비평)
연남동 복합문화공간 씨알콜렉티브에서 열린 작가 장입규의 세 번째 개인전. 전시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누가 우리 귀여운 코끼리의 코를 잘랐나.'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그 영화는 공포 영화였을까? 만약 코끼리가 출연했다면 그 코끼리는 귀여웠을까, 아니면 기괴했을까? 하지만 이러한 질문을 뒤로 한 채 전시공간에선 코끼리를 다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1929년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가 <이미지의 배반 (La Trahison des images)>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썼던 것과 유사한 맥락으로 장입규는 '이것은 코끼리가 아니다'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제시했다. '코끼리'는 기호일 뿐이며, 장입규는 예리한 칼로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귀여운 코끼리의 코'를 자른 사람은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이다. 게다가 이 문장은 물음표 대신 마침표로 끝나기에, 우리는 작가가 누가 코끼리의 코를 잘랐는지 묻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전시명은 작가의 고백에 가까운 독백이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코끼리 대신 옷걸이, 의자, 벽시계, 쓰레받기, 훌라후프, 지팡이 등 익숙한 일상의 사물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 사물들로부터 핵심 구조를 제거해버렸다. <Cut and Paste>(2019)에서 의자는 등받이만 남은 채로 벽에 부착되어 있고, 일부만 남은 옷걸이는 무게 중심이 맞지 않아 옷을 걸 수 없으며, 가방은 손잡이만 남아 물건을 담을 수 없다. <Reconstruction>(2019)의 경우 작가는 조명 받침대와 샤워기를 선택해 마치 원래부터 하나의 사물이었던 것처럼 연결했다. 이 작업은 고전적 레디메이드(ready-made)에 관한 오마주이기도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자전거 바퀴(Bicycle Wheel)>(1913)와 같은 레디메이드는 인간의 감정과 거리를 유지하는 반면, 장입규의 작업은 마치 초현실주의 오브제처럼 매력을 발산하며 말을 걸어온다.
<The Chair that No one can sit in>(2019)의 경우, 좀 더 연극적이다. 의자에 기댄 폭이 좁은 거울 속 누군가의 방 안 모습이 보인다.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검은 여성 구두 한 켤레와 푸른 페인트로 칠한 벽면, 옷걸이에 걸린 회색 수건도 보인다. 발걸음을 옮겨 옆으로 이동하니 거울이라고 생각했던 사물은 거울이 아니었다. 조작된 공간, 이 상황은 연극의 무대처럼 동선까지 철저하게 계획한 결과였다. 작가는 이를 통해 인간의 감각 지각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실험했다.
작가는 자르고 붙이는(Cut and Paste) 디지털 편집 방식을 현실 공간에 적용하면서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다. 그런데 픽셀에 의존하는 가상의 세계에서 자르고 붙이는 행위는 지극히 평면적이지만 장입규의 작업 행위는 물리적인 동시에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 그의 작업에서는 사진을 자르는 행위조차도 3차원적이며 수공예적이다. 나무 의자조차도 오차 없이 절단하는 장입규의 작업은 인간 삶의 환경, 특히 매체 환경의 변화에 관한 질문이 담겨있다. 마치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이 영화<모던 타임스(Modern Times)>(1936)에서 20세기 초 인간이 적응해야 하는 세계의 속도에 관해 탐구했듯, 장입규는 21세기 초 인간이 적응해야 하는 상황은 어떠한지 일상 사물의 변용을 통해 진중하게 질문한다. 20세기 초 인간이 공장 기계의 속도에 맞춰야 했다면, 21세기 초 인간은 기호와 암호로 가득한 가상의 문법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 역설적이게도 장입규는 사물을 자르고 붙이는 물리적 활동을 통해 기호화된 일상이라는 현실의 연극 무대를 구축했다.
장입규는 레디메이드 개념을 재해석했고, 감각 지각의 상호작용을 탐구했다. 그는 코끼리 없는 코끼리 전시, 초현실적 레디메이드 그리고 디지털 편집 방식의 수공예적 구현이라는 아이러니 속에서 보여주기와 이름 붙이기, 복제하기와 분절하기, 바라보기와 읽기라는 대립을 놀이와 웃음으로 삭제해버렸다.
누가 우리 귀여운 코끼리의 코를 잘랐나.
유진영(큐레이터)
오랜 세월 유럽 대륙에서 종적을 감춘 채 신비의 동물로 일컬어져 온 코뿔소는 16세기 초, 인도 사절단과 함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다시 등장했다. 이 신비의 동물은 입에서 입을 타고 그 기묘한 존재감을 유럽 곳곳에 과시했다. 뒤러의 코뿔소 역시 이 시기 한 상인의 말에 뒤러 자신의 상상을 덧붙여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갑옷같이 딱딱한 껍질로 둘러싸인 몸, 비늘이 돋은 다리, 가시처럼 뾰족한 엉덩이의 뿔을 가진 뒤러의 코뿔소는 구조적 오류가 발생한 이미지 파편들의 엉성한 조합처럼 보인다. 이 코뿔소에게 콧잔등에 난 뿔은 더 이상 유일무이하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코뿔소는 그 뿔보다는 갑옷같이 두터운 피부가, 혹은 얼룩 반점으로 뒤덮인 색깔이 더 주요한 특징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뒤러의 기묘한 그림이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코뿔소를 표상하는 절대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은 주관적 인식의 다발로써 형성되는 대상 개념의 허상성을 드러낸다.
《누가 우리 귀여운 코끼리의 코를 잘랐나.》에서 장입규는 하나의 대상을 이루는 보편적 관념 체계를 의문시한다. 코끼리를 가장 코끼리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눈을 감고 만져보아도 단박에 코끼리임을 알아챌 수 있게 하는 것은 역시 코뿐일까? 대상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시간과 언어, 갖가지 신념의 응집체는 그것에 단단히 붙어 사고의 우회로를 막는다. 장입규는 이러한 관념과 개념 사이의 역학 관계를 비틀어 본다. 우연히 사물을 자르는 것에서 출발한 그의 이번 작업은 디지털 매체의 편집 기법인 ‘잘라내기,’ ‘붙여넣기,’ ‘복사하기’ 등을 스크린 위가 아닌 실제 공간 안에서 수행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디지털 세계의 문법을 물질세계에 옮겨오는 그의 시도는 동시대의 시지각 체계가 디지털의 논리 안에서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실험해보는 실험의 장이다. 대상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형성되는 우리의 인식체계에 관해 질문하는 작가의 행위는 의자 반쪽이나 빗자루의 머리를 뚝 ‘잘라내기’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물리적 세계에서 디지털 상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장입규의 행위는 아이러니하게도 대단히 아날로그적이다. 대상을 자르고 붙이는 과정뿐 아니라 사물의 선택 과정 역시 물리적인 여정을 수반한다. 유영하듯 흐르는 웹에서의 정보 수집 과정과는 달리 그는 한 발, 한 발 몸을 움직여 갖가지를 수집한다. 찾고 싶은 키워드를 검색창에 입력하는 것이 웹서핑의 첫 단계라면 장입규의 검색 과정은 이와는 정 반대이다. 그는 무엇을 만날지, 무엇을 사고 싶은지에 대한 어떠한 예측도 없이 자신이 머무는 장소 곳곳의 벼룩시장과 길거리를 헤매다가 우연히 마음에 맞는 대상을 발견하고 선택한다. 그것은 다리 하나가 짧은 의자가 될 수도, 시간이 멈춰버린 시계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발견되고 선택된 사물들은 벽면의 그리드(cut and paste, 2019), 혹은 사진의 프레임(cable, 2019) 안에서 마음껏 변용되고 재배치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끝없는 유비는 장입규의 작품 안에서 경쾌한 방식으로 궤적을 이룬다. 옷걸이의 잘려나간 한 귀퉁이는 저 너머의 벽면에 능청스럽게 붙어 원래 그렇게 생긴 양, 혹은 그곳이 자신의 제 자리인 양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비와 분리되었던 빗자루의 손잡이는 다른 물건의 손잡이들과 짝을 이루어 없어진 몸통을 다른 곳으로부터 ‘붙여넣기’ 중이다(Delete, 2020). 그렇게 수공으로 ‘잘라내기’와 ‘복사하기’, ‘붙여넣기’를 반복한 편집의 결과물은 최대한 납작한 모습으로 실제의 공간을 점유한다. 그러나 매끈한 스크린 위에서 하나의 면이 되어버린 세계와는 달리 3차원의 물리적 세계에는 여전히 방향성이 존재한다. 붙여 넣어진 사물의 조각들은 어디에서 보아도 무관할 듯해 보이지만, 이내 평면의 세계를 튀어나와 물리적 공간의 질서와 부딪힌다. 그렇게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편집된 사물의 면면은 현실과 디지털 세계의 경계를 오가며 오작동하고 두 세계 모두를 비튼다.